2011년 4월 26일 화요일

[퍼온글]미래는 선택하는 것, 절대 운이 아냐

미래는 선택하는 것, 절대 運이 아냐!
역사 속에서 CEO의 제왕학을 읽다(1)-역사와 미래
“전쟁 시기·장소 선택해야 승리 … 약체 신라는 지도부 솔선수범으로 삼국통일”
국제경영원-이코노미스트 공동기획
정리=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미래가 궁금해질수록 사람들은 역사에 침잠한다. 역사를 읽다 보면 조그만 선택 하나가 제국의 흥망을 가르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 부설 국제경영원(IMI)과 이코노미스트가 ‘역사 속에서 CEO의 제왕학을 읽다’라는 주제로 제1기 CLIG 최고경영자 과정을 시작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지난 9월 22일 입학식이 진행된 첫날부터 많은 경영자가 역사의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역사와 미래’라는 주제로 과정을 연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강의를 요약해 싣는다.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도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전 중에는 예언서도 많다. 대표적인 동양 예언서는 주역이다.

성서 역시 예언서의 일종이다. 그 밖에도 우리나라의 정감록, 서양의 노스트라다무스 등이 대표적인 예언서로 꼽힌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책들은 일종의 예언서인데 예언은 무조건 닥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즉 예언은 불변성이다. 이에 반해 요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래학은 현재 인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다. 미래학에서 말하는 미래는 가변성이 있다.

로열 더치 셸의 일류화에 얽힌 사연

미래학은 원래 냉전시대 미·소 간의 핵전쟁 발발 시 어떻게 될까를 예측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측해야 이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패권국과 주변국을 가르는 기준이다. 역사에서 종속변수로 사는 주변국들은 미래를 예측할 필요도 없고 예측할 능력도 없다.

하지만 패권국가들은 역사의 매개변수가 되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기 바쁜 회사들은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들은 미래를 예측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적용하는 대안적 미래다. 미국 허드슨 연구소의 허만 칸 소장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 칸 소장은 1960년대에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선진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로 뛰어난 예측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와서 보면 뭐 당연한 얘기 같지만 당시 한국은 지금으로 보면 아프리카의 어떤 국가 정도 되는 지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안목이다.

대안적 미래예측은 일종의 시나리오 계획으로 미래에 일어날 가상의 시나리오를 몇 개 준비해 각각의 시나리오에서 예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 방법을 정해 놓은 것이다. 이 방법을 사용해 대표적으로 성공한 기업이 다국적 석유회사인 로열 더치 셸이다. 1970년대 초 셸은 향후 유가 움직임을 예측했다.

두 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하나는 앞으로 유가는 상당기간 안정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견해였다. 회사 내의 견해였던 이 주장은 당시로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기획전문가인 피에르 왝은 일반적인 의견과 달리 유가가 크게 인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왝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1961년 구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회원국을 늘리면서 부상하고 있었고, 1967년 시작된 중동전쟁에서 서방이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에 OPEC 회원국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왝의 예측은 적중했다. 1973년 9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35차 OPEC 회의에서 유가는 단번에 70% 인상됐다. 또 같은 해 10월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고 유가는 그해 12월 단번에 다시 130% 인상됐다.
이후 거의 매년 유가가 인상되면서 1973년 배럴당 3달러이던 원유가격은 1980년 30달러로 치솟았다. 하지만 이런 대안적 미래를 예측했던 셸은 70년대 초반 매출 7위 기업에서 매출 2위, 이익률 1위 기업으로 올라서게 된다.

또 하나는 선택적 미래다. 대안적 미래는 수동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예측해 대응하는 것이지만 선택적 미래는 다양한 선택의 상황에서 스스로 하나를 택하는 능동적인 미래를 말한다.

고구려 영류왕의 실책

현재는 과거 선택의 결과물이듯 미래는 현재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 역사도 선택적 미래에서 보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선택하는 미래로 한국사를 보면 한국사의 순간들이 새롭게 보인다. 오늘은 이 관점으로 한국사를 살펴보겠다. 먼저 통일된 수나라와 대결해야 했던 고구려 왕들의 대응을 살펴보자. 

5호 16국으로 분열을 겪던 중국은 수나라의 문제가 통일을 했다. 이때 고구려의 평원왕은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중국이 통일되면 반드시 우리나라 민족과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평원왕이 전쟁 준비 중에 죽게 되고 이어 영양왕이 등극한다. 이때 평원왕의 예상대로 수나라는 고구려를 협박하는 국서를 보내왔다. 

사실 아무리 고구려가 강성했다고 해도 중원의 제국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두려움에 제대로 된 선택을 못하게 된다. 하지만 영양왕은 공포를 객관화할 줄 알았다. 공포를 관리할 수 있다면 위기를 지혜롭게 넘길 수 있다. 영양왕은 수나라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요하지방을 선제공격해 수나라에 대승을 거둔다. 

어떻게 그런 과감한 행동을 했을까? 우선 영양왕은 선제공격을 통해 국론분열을 막았다. 화친론과 강경론이 대립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어떤 것을 택해도 나라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선제공격을 통해 전쟁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내부분열을 막은 것이다. 또 이왕 전쟁을 하려면 시간과 장소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선택 당하는 전쟁보다는 선택한 전쟁이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연전연승을 거둔 것은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자신이 택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 경영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결국 수 문제는 요하지방 선제공격에 복수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선두에 세워 30만 대군을 보냈지만 대패하고 만다.

이처럼 평원왕, 영양왕의 탁월한 대 중원 대결정책은 영류왕에 이르러 수성에 안주하면서 빛을 잃기 시작한다. 이후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의 정변이 일어나고 국론이 분열되면서 고구려는 세를 잃기 시작했다. 만약 영류왕이 수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대 중원 강경책을 폈더라면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권국으로 자리를 굳건히 하면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수 있다.

반면 신라는 원래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훨씬 약체였지만 선택적 미래를 적절히 활용해 통일을 이룩한 경우다. 통일신라의 두 주역인 김유신과 김춘추는 신라 성골 입장에서 보면 흠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신라에 복속된 가야계 왕족 후손인 김유신과 성골이지만 쫓겨난 왕족의 후손이었던 김춘추는 신라 사회의 주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641년 백제의 무왕이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성주로 있는 곳을 점령하고 일가족을 몰살시키면서 김춘추는 ‘내가 반드시 백제의 왕실을 짓밟겠다’고 다짐한다. 고구려와 백제에 밀려 수세적, 방어적 국가 경영을 하던 신라는 이때부터 국가적 어젠다를 수성에서 공격으로 바꿨다. 

실제 김춘추가 이 말을 한 뒤 20년이 지나지 않은 660년에 백제는 멸망한다. 이처럼 국가적 어젠다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물론 어젠다를 선택한 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신라가 백제를 제압한 계기가 된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은 네 번이나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바닥이었다. 

이때 김유신의 동생인 김흥순의 아들 반굴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하게 된다. 이를 본 화랑 관창의 아버지는 “대장군의 조카도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하는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다그쳐 관창을 적진으로 보낸다. 관창 역시 계백장군에게 생포돼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런 리더들의 솔선수범이 위기에 처한 신라군을 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된다.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젠다를 선택하고 그 어젠다를 실현할 수 있는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런 어젠다를 가지고 있는지, 또 그 어젠다를 실현할 만큼 지도층이 솔선수범하는지를 생각해 볼 때 걱정되는 점이 많다.

정조의 비주류 등용 정치 성공작
위기관리 못지않게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이념이다. 조선의 개국은 고려 말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반면 조선 후기 때 성리학자들이 양명학과 서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조선은 활력을 잃고 쇠퇴기에 접어든다. 만약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의 혁신 방법으로 양명학이나 서학을 수용했더라면 조선왕조가 그렇게 허약하게 끝을 맺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변화도 미래를 알기 위해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 요소다. 주류는 그 사회의 현주소를 정확히 반영하지만 미래의 변화는 대부분 비주류들에 의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주류의 주장을 경청하면 미래를 읽을 수 있다. 이를 가장 잘한 조선의 임금이 바로 정조다.

정조는 비주류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제도권에 수용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기업들도 이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기 기업의 비전이나 미션이 활력을 잃고 있다면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또 비주류들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여기서 나오는 발전적인 의견을 폭넓게 수용해야 조직이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이처럼 선택적 미래는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고, 지금 변화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고 볼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 선택적 미래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경영자 여러분도 매일 전투 같은 경영현장에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를 잘 관리해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http://blog.joinsmsn.com/raphason/11540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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